지토 여제 이야기

진신의 난을 넘어

황위 계승을 두고 벌어졌던 고대사 최대의 내란. 오아마 황자, 그를 절묘하게 보좌한 사라라, 그리고 아들과 호족들이 합세한 ‘연대’로 이루어낸 승리였습니다.

복수, 진신의 난

텐지 천황이 붕어한 후 실권을 장악한 오토모 황자에게 있어, 인망이 두터운 오아마 황자는 자신의 지위를 위협하는 존재였습니다. 그 불안은 적중해, 오아마 황자는 은거한 상황에서도 항상 황위 탈환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요시노에 은거한 지 약 8개월 후, 조정에 무기 운반 및 요시노 폐쇄의 움직임이 있음을 알고 거병. 사라라는 “오토모 황자는 텐지 천황의 강압적인 정책을 이어받고 있어 조정에는 불만을 품은 호족이 많습니다. 이들을 우리 편으로 삼으면 이길 수 있습니다.”라고 조언. 오아마 황자는 이세(伊勢), 미노(美濃), 오와리(尾張) 등의 호족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고, 교통의 요지였던 스즈카(鈴鹿), 후와(不破: 후의 세키가하라)도 봉쇄했습니다. 이런 전략이 승리 요인이 되어 오토모 황자는 패주하여 자결. 이 ‘진신(壬申)의 난’을 묘사한 『니혼쇼키(日本書紀)』에는 사라라가 “함께 전략을 구상했다”고 적혀 있어, 사라라도 작전에 깊이 관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들들의 눈부신 활약

오아마 황자에게는 사라라의 아들 쿠사카베(草壁) 황자 외에 9명의 황자가 있었습니다. 장남인 타케치(高市) 황자는 유능하여 진신의 난 때, 후와에서 총지휘를 맡았습니다. 그 후, 쿠와나(桑名)에 있던 오아마 황자와 합류하는데 성공하고 군을 승리로 이끌어 공적을 남겼습니다. 또한, 오타 황녀의 아들 오츠(大津) 황자는 쿠사카베 황자의 동생으로, 문무양도에 뛰어났고 그 품행도 남달라 조부였던 텐지 천황도 총애했습니다. 또한, 후에 ‘타이호 율령(大宝律令)’을 편찬할 정도로 빼어난 오사카베(忍壁(刑部)) 황자도 있어, 우수한 황자들은 오아마 황자에게 큰 자랑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쿠사카베 황자의 평범한 자질을 눈에 띄게 하여, 후의 ‘요시노 맹약’을 낳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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