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읍지 아스카(飛鳥)에서 펼친 황친(皇親) 정치
673년, 오아마 황자는 텐무 천황으로 즉위. 이 시기에 ‘대왕’ 대신 ‘천황’이라는 호칭이 쓰이게 됐습니다. 텐무 천황은 황자를 중심으로 한 황친 정치를 펼쳐, 새로이 호족들의 신분을 정한 ‘야쿠사노카바네(八色の姓)’도 발포. 요직을 유력한 호족에게 맡기는 것을 그만두고, 천황에게 권력이 집중하게 했습니다. 텐지 천황의 강압적인 정치를 반면교사로 삼으면서 호족의 힘을 유연하게 억제하는, 이런 방법이 통한 것은 텐무 천황의 카리스마 덕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정치에서 물러나있던 공백기를 메꾸기라도 하듯 아스카 키요미하라료(浄御原令) 법령,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 편찬, 후지와라쿄(藤原京) 천도 등 수많은 정책을 내놓았습니다. 단, 이 계획들은 모두 장대한 계획이었기에 텐무 천황 생전에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요시노 맹약’이 갖는 의미
황위 계승 문제를 고민한 텐무 천황과 사라라는 쿠사카베 황자, 타케치 황자, 오츠 황자, 오사카베 황자, 카와시마(川島) 황자, 시키(芝基) 황자의 여섯 황자를 데리고 요시노로 행차. 그곳에서 “배다른 형제라 해도 서로 돕는다”는 맹세를 쿠사카베 황자부터 순서대로 선서하게 합니다. 천황과 황후에게서 태어난 쿠사카베 황자가 황태자의 자격을 갖추고 있으나, 바로 밑의 남동생 오츠 황자에게는 정치적 자질이 있고 지지자도 많았기에 입장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한 번은 황위를 포기했음에도 불구하고 텐지 천황의 아들 오토모 황자를 쓰러트리고 즉위한 텐무 천황으로서는, 아들의 입지를 명확히 하여 자신의 정당성을 표명하는 의도도 있었을 것입니다. 텐지 천황의 아들인 카와시마 황자와 시키 황자도 자신의 황자로서 요시노에 동행하게 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